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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짧은 글]과거를 매듭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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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동창을 만난다. 가물가물한 그 때의 기억을 겨우 끄집어내어 대화를 풀어나간다.

중학교 동창을 만난다. 꽤 선명하고 어설펐던 그 때를 추억하며 웃음을 만들어 낸다.

고등학교 동창을 만난다. 돌아보면 별 것 아닌 그 때의 시름과 절망을 되새기며 아쉬워한다.

대학교 동창을 만난다. 한없는 자유에 몸을 내맡긴 채 떠돌았던 무책임한 자아를 공유한다.

 

과거 어느 시점에 여전히 붙잡혀 있다.

 

트라우마는 아니다. 후회는 없다. 하지만 붙잡혀 있다.

 

다시 돌아간다면, 이라는 무의미한 가정은 하지 않는다. 다만 정성들여 필기한 공책을 버릴 때

주저되는 그런 마음이리라. 버려야하지만 버리기가 힘들어 오히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다.

 

어린 시절, 새학기에 가장 기대되는 것은 새로운 친구이다. 어떤 친구가 우리 반에 있을까.

누구와 친해질까. 저 친구는 어떤 성격일까. 두려움과 호기심은 삶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언제부턴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신선하지 않다.

그 사람은 새롭지만, 사람에 대한 새로운 기대가 전혀 없는 마음에 파문은 일지 않는다.

기대 없이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간다. 과거 언젠가 통용됐던 제스처와 추임새, 그리고 과거

언젠가 봤던 리액션과 공허한 웃음들, 그 속에 주차를 하여 안정감을 느낀다. 기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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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한 번, 또는 두 번. 과거의 친구를 만난다. 여전히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현재 삶의 피폐함을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던 대화는 결국 과거 어느 시점으로 빨려 들어가듯 매듭짓는다.

그 뻔한 결말을 알면서도 정기적으로 가지는 만남은 어떤 의미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과거를 되새긴다는 것은 과거로 가지 않고서도 과거를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되새기고 되새기는 그런 반복 속에, 과거 입었던 상처는 묻히고 희석되고 풀어져간다.

무수한 반복 속에 함께 얘기해준 친구는 다시 상처를 드러내고 봉합하고 연고를 발랐다.

 

어느새 과거는 과거가 되어 있었다.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과거 속의 사건.

그렇게 과거를 덮는 데 많은 시간이 들었었나 보다.

그렇게 친구와 나누는 술은 과거를 조금씩 씻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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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매듭짓는다.

어느 시점에 더이상 풀리지 않는 꼬임을 매듭지어 잘라버린다.

매듭은 흔적을 남기지만 더이상 아픔은 아니다.

오히려 더 튼튼한 밧줄이 되어 지지한다.

 

다시 새로운 사람들을 본다.

그들의 매듭과 흔적을 본다.

기꺼이 나의 밧줄을 함께 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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