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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짧은 글]소통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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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들 말한다.

 

왜 말을 안하냐고.

일이 커지기 전에 말을 했으면 되지 않냐고.

왜 이렇게 소통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런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에게는 특징이 있다.

도저히 말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 같은 느낌.

변화가 기대되지 않는 상대에게 우리는 입을 열지 않는다.(상황의 변화에서 사람의 변화까지 전부 포함된) 

그러한 상대에게 말을 계속 한다는 것은 '갈등'을 계속 키우겠다는 의미 이상은 아니니까.

 

특히나 상대방이 더 어른(고참, 상사, 연장자 등)일 경우 

자신의 의견을 가감 없이 말하는 것은 무모한 행동, 지혜롭지 못한 행동으로 타박받기 쉽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젊은이(나이에 무관하게 입장적으로)는 어른에게 입을 다문다.

 

 

거의 모든 위계가 있는 직장에서 상대적으로 젊은이들의 태도는 비슷하다.

그 말은 거의 모든 위계가 있는 직장에서 상대적으로 어른들의 태도가 비슷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과거로 가보자.

 

학창시절, 열이 나고 아픈 상황. 조퇴를 하고 싶다. 

하지만 '조퇴를 할 정도냐', 라는 질문에 반드시 '그렇다', 라고 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많이 참아왔고, 항상 참아왔으며,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웠다.

이번에도 조금 더 참을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아프다.

담임선생님께 조퇴를 해도 괜찮겠느냐, 라는 말씀을 드리기가 너무 어렵다.

아픈 모습을 더욱 아픈 모습으로 연출하는 과정도, 구구절절 아픈 현상을 설명하는 것도 힘들지만

보다 힘든 건 실컷 어필한 후에도 보내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 한층 더 힘든 것은

아예 준비한 말 조차 할 기회가 없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저번에 잘못한 걸로 혼나지는 않을까, 약점 잡힌 것은 없는 지 갑자기 숭고한 자기반성을 하더니

결국 말 한 번 꺼내보지 못하고 책상에 엎드려 버틴다.

 

요즘은 그런 면에서 참 자유로워졌지만 예전엔 정말 조퇴나 결석은 신이 허락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담임선생님 수업까지 엎어져 있다가 옆자리 친구가 대신 아프다고 말해줌으로써

나의 심각성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는데 성공하기까지 참 길고 힘든 시간들이었다.

 

그 시절,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아프다는 말을 왜 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비단 예전의 일만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가 직장에서 반복하고 있는 일이다.

나의 고유한 권리라는 '연가'는 항상 어렵사리 구두결재를 맡고 진행되어야 하고,

그 구두결재의 중압감에 눌려 항상 스스로 사전검열, 상황파악을 실시하고 있으니 권리라는

의미가 얼마나 초라한 지 매번 느낄 뿐이다.

 

사실 어른들은 그 어떤 반박의 '말'도 하지 않았을 지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쉽게 들어줄 것 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면(말 그대로 편견 없이 듣는)

젊은이는 결코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먼저 반박하고 가르칠 준비를 한 상태에서 듣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이것은 '스킬'의 문제가 아니다.

대화하는 상대방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이다.

 

우리나라의 어른들은 젊은이를 존중하고 인정하고 있는가.

혹 자신의 권위가 무너질까봐 지나치게 누르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옛날에는'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 것은 아닌가.

 

조금 더 들어가보자.

 

우리나라에서 문제는 보통  '수직적인 소통'에서 일어난다.

 

수직적인 관계에서는 항상 어른과 젊은이가 등장하며, 젊은이는 숨기고 어른은 추궁한다.

젊은이도 어른이 어렵지만 사실 어른도 젊은이가 두렵다.

젊은이는 어른을 과하게 알고 있다고 믿으며, 어른은 젊은이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그들은 표면적으로 서로를 알고 표면적으로 대하며 표면적으로 소통한다.

큰 문제가 없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관계로 지속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우리의 삶에는 항상 어떤 '사건'이 생기게 마련이다.

 

사건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하고 실천을 요구한다.

예상치 못한 사건은 젊은이를 당황시키고 판단을 보류시킨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행동은 느려진다.

말은 해야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고, 사건은 이미 수많은 어른들 사이로 퍼져간다.

 

남은 건 문책, 책임을 묻는 시간이다.

 

어른들, 젊은이들 할 것 없이 모두 문제에서 저만치 멀리 떨어진 채 지켜본다.

 

소통의 중심에 책임이 놓이게 되면 오로지 자신의 면책사유를 위주로 발언을 하고

다른 사람의 면책사유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공격을 일삼기 일쑤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그 이후의 소통이란, 뻔한 스토리다.

 

하지만 문제가 항상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면책사유'를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도 당연하며, 일견 짠하다.

 

누가,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위축되게 만드는가.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본다면 어떤 집단 내에서 소통이 안 되는 것은

단순히 그 집단 내의 문제, 양자 간의 문제라기 보다는 사회 분위기의 문제인 것 같다.

사회가 추궁하고 있으니 사람도 추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정한 의미에서 '소통'은 가능한 것일까.

 

이 짧은 글에서 더이상 얘기하기는 힘들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힘써서 책임을 다하는 방법 밖에 없으며 어떤 문제든 공유한다면 해결할 방법이 떠오를 것이다. 이 때 가장 좋은 도구는 소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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