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득

[에세이]반영된 언어

반응형

 

교육학에서 비고츠키는 언어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

언어는 생각의 매개체이자 동시에 생각, 그 자체이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언어를 통해서 인간의 사고가 발달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진정 안다고 말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중요한 언어는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오히려 아낄수록 미덕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현 시대는 자기 PR시대이지만 침묵은 자기 PR에 있어 중요한 전략적 수단이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다원화되고 개인화된 현대 사회에선 자연스러운 귀결일지도 모른다.

워낙 다양한 인간들(사실 내 생각에 별반 다를 것도 없다고 느끼지만)의 이해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진화적 결과일지도 모른다.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상대주의의 높은 이상은

현실 속에서 서로 간의 대화와 타협으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아무도 자신의 말을 하지 않는다. 요즘 사회는 뻐꾸기의 합창이다.

아니면 인간에 의한 메아리라고 해야 하나.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이해하기 위해서는 올곧이 상대방을 알고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자신의 얘기를 하려고 하지 않는 이들이 너무 많다. 

 

자신의 언어와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은 표면적인 일상적인 의미가 아니다.

보다 내면화된 그리고 이성적 존재로서의 주장이다.

 

우리는 누구나 각기 다른 환경에서, 설혹 같은 환경이라도 다른 과정을 겪으며

성장하고 자신을 완성해 나간다. 당연히 우리는 서로 다르다.

그런데 그 차이를 좁히기 힘들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차라리 그냥 인정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그냥 인정하는 것, 이것은 정말 인정하는 것일까?

 

누군가 말다툼을 하고 있다. 아니 격렬한 토론 일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서로에게 감정적으로 기분이 상했다고 치자.

이것은 그들이 그냥 다르기 때문일까

다르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기분이 상한 채로 그들의 대화가 끝이 났을까?

누군가가 그들에게 물어보았을 때 그냥 달라서 그래, 라는 말로 답변하는 것은 

상대를 인정하는 것일까? 

진정 상대주의자라면 화가 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사상이 달라서" 라는 표현을 참 많이 사용한다.

사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자.

사상은 감성보단 이성적 결과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은 어디에서 발생하며, 같은 경험은 어떻게 다른 사상을 만들 수 있을까? 

 

내 생각에 '사상'은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입장이다.

, 단순히 경험이 쌓여 만들어진 누적적 반사적 사고가 아니라

적당한 노력이 가미된 반성적 이상적 사고이다.

이러한 사상은 경험을 초월하며 발전적이며 미래지향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사상이 미래지향적-반성적 사고라면 사상이 다르기 때문에 대화가 되지 않을 수는 없다.

이것은 동시에 가변성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 경험에서의 의견 충돌과 감성적 귀결은 사상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사상적 이유가 표면에 있더라도 감성을 좌우하는 것은 본능적인 영역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대화에 상대주의의라는 기지를 내세우기엔 너무 초라하다.

 

그럼 같은 표현을 각자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은 사상의 문제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그들의 인식적 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인정한다. 

특정한 언어, 표현방식, 어떤 상황과 결부된 경험이 만들어낸 인식적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갈등 상황이 발생하고 나면 더이상 자신이 그런 상태에 처해있다는 것을 쉽게

잊어버리기도 한다.

자신의 경험속에서 만들어진 '색안경'에는 색이 없다고 믿는 듯하다.

역시나 본능적 영역이며 사상적 문제와는 거리가 있다.

 

이런 자의적 해석은 계속 누적될 경우 악의적 행동도 유발할 수 있다.

상대의 실수를 고의로 해석하고, 고의로 보복한다면, 그 상대는 새로운 악의에 의한

새로운 경험을 토대로 악의적 해석에 익숙해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 누군가에게 악의적 행동을 반복할 수 있다.

 

침묵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보자.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그러다 보니 진정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현을 감추는 방향으로

사회성이 진화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가장 강력한 도구가 바로 '침묵'인 것이다.

여기서의 침묵은 사전적 의미가 아니다. 사상의 침묵이자 내면에 대한 침묵이다.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는 현대인으로서 가장 편하고 확실한 표현 방법인 것이다.

 

근데 반동적으로 감정의 표현은 되레 솔직해졌다.

아마도 미묘한 정신세계보다 훨씬 오해의 소지가 적다는 이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감정적 표현으로서 거리를 조절하고 자신을 보호한다.

각 종 '연줄'들이 사회에 만연한 이유일 수도 있다.

친한가, 친하지 않은가의 문제가 곧 옳고 그르고의 문제로 치환되는 현실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공격을 받을 경우 지나치게 방어적이 되곤 한다.

그리고 '가장 좋은 방어는 항상 공격'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생각과 경험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대한다.

인간이라는 말은 동시에 사회적이기 때문에 이것은 분명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노출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회가 되버린 것은

그만큼  우리사회가 관계적으로 위험한 사회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리가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말의 의도를 생각하는 까닭은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보다는 말을 하는 상대의 감정을 파악하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감정적 의도를 지닌 채 언어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고,

스스로도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필연적이다.

그 필연성을 피해보고자 최대한 노출을 피하고 침묵을 선택하지만 완전하지는 않다.

불행하게도 서로의 생각을 완전히 알 수 없는 우리는 대게 안 좋게 해석하고

너무 쉽게 스스로 불행해져 버린다.

 

내 소박한 소원은 우리가 조금만 내면에 대한 침묵을 해제하고 살자는 것이다.

어차피 언어는 반영되어 있는데 숨기려 들면 들수록 해석은 복잡해진다.

그냥 조금만 서로를 노출시키고 침묵을 해제한다면 자연스로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반응형

'문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대장] 10월 초대장 배부합니다.  (37) 2017.11.01
[짧은글]잠수  (0) 2017.10.25
[수필]화장실, 가장 낮은 곳에서 드러나는 가치  (0) 2017.08.22
[초대장]5월 초대장 배부합니다.  (15) 2017.06.06
[짧은글]질문  (0) 2017.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