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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짧은글]유리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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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즈음의 기억이라 사실 기억인지 상상인지 꿈인지도 확실치 않은 일이다. 바닷가 근처 단칸방에 살던 시절, 참 부지런히 싸돌아 다녔다. 아는 게 없어서 그냥 돌아다니는 것만 해도 주변엔 신기한 것 투성이였다. 집으로 한 번에 돌아오지 못해 작은 마을을 몇 바퀴씩 돌다 지친 적도 많았다. 하루는 집 근처 큰 나무 밑에 버려진 유리잔을 보았다. 멀쩡해 보이는 유리잔이 버려져 있기에 누가 버렸을까, 왜 버렸을까, 가지고 가도 될까, 온갖 생각을 하며 유리잔을 바라보았다. 바라보기에 지쳐갈 즈음, 나도 모르게 덥썩 유리잔을 잡았다. 아마도 들고 가려고 했으리라.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유리잔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손에 쥔 상태에서 산산조각난 유리들은 나의 손을 찢으며 바닥에 떨어졌다.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유리가 떨어지고 난 후 놀랐던 것 같다. 약간의 멍한 시간이 흐르고 깨진 유리 조각들을 다시 쳐다보기 시작했다. 왜 깨져버렸을까. 너무 세게 잡았던 것일까. 두리번 두리번, 하지만 지그시 깊은 관찰의 눈으로 유리를 만났다. 투명하기도 반짝이기도 하는 이질적인 존재는 무척 매력적이었다. 보면 볼수록 아름답다는 느낌을,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하게 받았던 것 같다. 흐르는 피도, 아픔도 그 아름다움에 밀려나 존재감이 없었다. 마치 너와 함께 한 고통과 슬픔이 묻혀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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